1928년 9월, 런던 성 메리 병원의 세균학자 알렉산더 플레밍(Alexander Fleming)은 여름휴가를 마치고 실험실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배양 중이던 포도상구균 접시 하나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합니다.
어디선가 날아든 푸른곰팡이 주변으로, 세균이 죽어 있었습니다. 보통의 연구자라면 오염된 배양접시를 버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플레밍은 달랐습니다.
"이건 오염이 아니라, 발견이다."
그 순간 인류의 역사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 항생제 이전의 세계 — 감염은 곧 죽음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폐렴에 걸려도, 수술 후 감염이 생겨도 항생제 한 알로 해결합니다. 하지만 1920년대까지만 해도 세균 감염은 사형선고에 가까웠습니다.
1차 세계대전(1914~1918) 동안 총탄보다 상처 감염으로 사망한 병사가 더 많았습니다. 외과 의사들은 팔다리를 자르는 것이 감염을 막는 가장 확실한 방법임을 알고 있었지만, 절단 후에도 패혈증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습니다.
플레밍은 이 전쟁에 군의관으로 참전했습니다. 그는 눈앞에서 수많은 병사들이 감염으로 죽어가는 것을 목격했고, "세균을 죽이면서 인체에는 무해한 물질"을 찾는 것을 필생의 과제로 삼았습니다. 1928년의 발견은 그 집착의 결과였습니다.
🔬 1928년 9월, 그 배양접시의 진실
플레밍의 실험실은 창문을 자주 열어두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아래층에는 곰팡이를 연구하는 동료가 있었고, 포자가 공기 중에 떠다녔습니다. Penicillium notatum 포자가 플레밍의 포도상구균 배양접시에 내려앉은 것은 그야말로 우연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결정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왜 플레밍만이 이것을 알아챘을까요?
발견이 가능했던 세 가지 조건
20년의 집착 — 플레밍은 이미 1922년 라이소자임(눈물 속 천연 항균 물질)을 발견한 적이 있었습니다. 세균을 죽이는 물질에 대한 레이더가 남다르게 예민했습니다.
버리지 않는 습관 — 플레밍은 배양접시를 바로 세척하지 않고 쌓아두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덕분에 이미 오래된 접시에서 곰팡이의 효과가 충분히 나타날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해 여름의 이상 기온 — 1928년 런던의 여름은 서늘했습니다. 곰팡이가 자라기 좋은 온도였고, 이후 기온이 올라가며 포도상구균도 다시 증식해 두 균의 대비가 극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우연은 실험실에 찾아왔지만, 그것을 역사로 만든 것은 준비된 눈과 20년의 경험이었습니다.

⏳ 발견에서 약이 되기까지 — 13년의 공백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발견한 것은 1928년. 하지만 실제 환자에게 투여된 것은 1941년입니다. 무려 13년의 공백이 있었습니다. 왜일까요?
플레밍은 페니실린이 실험실에서는 세균을 죽이지만, 너무 불안정하고 정제가 어려워 실용화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논문을 발표했지만 의학계의 반응은 미지근했고, 플레밍 자신도 연구를 이어가지 않았습니다.
🧪 페니실린을 약으로 만든 두 사람
하워드 플로리 (Howard Florey)
호주 출신 병리학자. 1938년 플레밍의 논문을 재발견하고, 페니실린의 임상 적용 가능성을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언스트 체인 (Ernst Chain)
나치 독일을 피해 영국으로 망명한 생화학자. 플로리와 함께 페니실린 정제·농축 방법을 개발하여 안정적인 형태로 만드는 데 성공합니다.
1941년 2월, 장미 가시에 찔려 패혈증으로 죽어가던 경찰관 앨버트 알렉산더에게 최초로 페니실린이 투여됩니다. 그는 극적으로 회복했지만, 약이 부족해 끝내 사망했습니다. 이 비극이 대량생산의 절박함을 세상에 알렸고, 미국과의 협력으로 2차 세계대전 중 대량생산이 이루어졌습니다.
🏆 1945년 노벨상 — 그리고 플레밍의 경고
1945년, 알렉산더 플레밍·하워드 플로리·언스트 체인은 노벨 생리의학상을 공동 수상했습니다. 페니실린의 발견과 실용화가 수백만 명의 생명을 구했다는 공로였습니다.
그런데 플레밍은 수상 연설에서 놀라운 경고를 남겼습니다.
"페니실린을 너무 적게, 너무 짧게 사용하면
내성을 가진 세균이 나타날 것이다."
— 알렉산더 플레밍, 1945년 노벨상 수상 연설
지금으로부터 80년 전, 발견자 자신이 항생제 내성을 예언한 것입니다. 오늘날 항생제 내성은 WHO가 지정한 전 지구적 공중보건 위협입니다. 플레밍의 경고가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셈입니다.

📌 핵심 정리
- ▶ 1928년 플레밍의 페니실린 발견은 반은 우연, 반은 20년의 준비 — 곰팡이는 날아왔지만, 그것을 읽은 것은 경험이었다
- ▶ 페니실린 이전, 세균 감염은 사실상 사형선고였고 1차 대전에서는 총탄보다 감염이 더 많은 병사를 죽였다
- ▶ 발견에서 약까지 13년 — 플로리·체인이 정제·대량생산에 성공해야 비로소 사람에게 쓸 수 있었다
- ▶ 플레밍·플로리·체인, 세 사람이 1945년 노벨 생리의학상 공동 수상
- ▶ 플레밍은 수상 연설에서 이미 항생제 내성을 경고 — 80년이 지난 오늘도 현재진행형
❓ 자주 묻는 질문 (FAQ)
Q. 페니실린은 정말 우연히 발견되었나요?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곰팡이가 날아든 것은 우연이지만, 플레밍이 그 의미를 읽은 것은 20년간의 연구와 집요한 관심 덕분이었습니다. 준비된 자만이 포착할 수 있는 우연이었습니다.
Q. 페니실린 발견 이전에는 감염을 어떻게 치료했나요?
효과적인 치료법이 없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부상보다 감염으로 사망한 병사가 더 많았습니다. 일부 화학요법제(살바르산 등)가 있었지만 독성이 강하고 적용 범위가 매우 좁았습니다.
Q. 플레밍이 직접 페니실린을 약으로 만들었나요?
아닙니다. 약으로 만든 것은 플로리와 체인 팀입니다. 플레밍의 발견 이후 정제의 어려움으로 13년이 지나서야 실용화되었습니다. 세 사람은 1945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공동 수상했습니다.
Q. 페니실린은 언제 처음 환자에게 사용되었나요?
1941년 2월, 장미 가시에 찔려 패혈증으로 죽어가던 영국 경찰관 앨버트 알렉산더에게 최초로 투여되었습니다. 극적으로 회복했지만 약이 부족해 끝내 사망했고, 이 사건이 대량생산의 필요성을 촉구했습니다.
Q. 항생제 내성 문제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나요?
플레밍 자신이 1945년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이미 경고했습니다. 실제로 1940년대 후반부터 내성균이 보고되기 시작했고, 현재 항생제 내성은 전 세계적인 공중보건 위협입니다.
💊 하나의 곰팡이가 수억 명을 살렸다
페니실린의 역사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같은 배양접시를 보고 누군가는 버리고, 누군가는 역사를 만듭니다. 준비된 눈과 포기하지 않는 집착 — 그것이 세계 최초를 만드는 조건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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